『초신성의 후예』
2025.08.14 · 독서
🖋 이석영 / 사이언스북스
문득 십수 년 전 마드리드에서 손가락을 다쳤을 때, 말도 안 통하는 나를 정성껏 병원으로 인도한 호텔 종업원에게 후에 감사의 표시를 하려 하자 그가 손사래를 치며 도망했던 것이 기억난다. “인간적”인 행위에 값을 매길 수는 없지 않은가. - 21p
우리가 우리 역할에 소홀할 때 땜질용으로 하는 행위는 감동을 줄 수 없다. - 23p
하지만 궁극적으로 참 비상구를 여는 사람만이 모두를 구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실패한 다른 시도들이 비상구를 찾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패는 없다. - 27p
얼마 전 미국 천문 학회에 가서 먼발치에서 보게 되었는데 60을 넘긴 노벨상 수상자가 아직도 혼자 잰걸음으로 방마다 다니며 다른 젊은 학자들의 발표를 듣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 32p
모든 연구원은 정직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고 느릴지언정 틀림없이 일했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서로를 신뢰했다. 그 결과 나사가 이룩한 것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이다. - 33p
둔필승총. 무딘 붓이 총명함보다 낫다는 말이니, 꾸준히 쓰고 익히는 사람이 날 때부터 총명한 사람을 이긴다고 해석할 수 있다. - 44p
진실은 부력이 있다. 그동안 감춰져 있던 내 악의 모습이 드러난다.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많이 배워 많은 지식을 가진것이 내 콧대에서, 어깨에서, 발걸음에서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나도 모르게 상석 근처로 발이 움직이고,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해 필요 이상의 자긍심을 갖는 것에 더 이상 부담이 없다. 나 외에는 다 속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내 생각을 듣고 읽고 수긍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 나는 허영에 빠졌다. 악마가 제일 좋아하는 그 죄악. - 55p
한번 이 진실을 깨닫게 된 이후, 모든 것이 변한다.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이해되고, 이해되지 않는 모든 것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이해된다. - 63p
훈련은 충실히 받아야 한다. 훈련 때 잘하는 사람만이 실전에서도 잘 한다. - 67p
그때 참 신기한 학생을 하나 만났다. 우리 심사 위원들의 질문을 모두 훌륭하게 대답하며 오히려 우리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하던 그 친구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자넨 우리 학과에 들어오면 어떤 연구 주제를 택하고 싶은가?” 그랬더니 그 친구 하는 말, “예, 저는 가장 어려운 문제를 풀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때 졸업하기 위해 회피하고 싶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그런 문제요.” 우리 모두 이 청년의 배포에 깜짝 놀랐다. 우린 만장일치로 이 학생을 합격시켰지만 그를 케임브리지에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우린 그날 꽤 흐뭇했다. 아, 아직 우리 젊은이들 가운데 현실을 넘어 이상을 보는 이들이 있구나. - 72p
우리의 사회를 기쁜마음으로 짊어지고 갈, 큰 이상을 가진 젊은이라면 직장을 선택하는 이유가 남달라야 할 것이다. 큰 이상을 품은 젊은이에게 “쉬운 직장”은 오히려 도전이 없는 심심한 직장이며, 수행한 일에 합당한 처우를 하지 않는 불공정한 직장이며, 그런 상황이 은퇴할 때까지 계속되는 절망적인 직장이라고 보일 수도 있다. - 75p
박사가 되는 과정은 대략 나이가 서른을 전후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 전에 겪어 보지 못한 큰일을 겪게 된다.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낳거나, 부모를 잃거나, 친한 친구를 하늘로 보내거나, 심지어 존재에 대해 회의하는 일까지도. 그런 일들 속에서도 나의 전문가를 향한 훈련은 계속된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도 땀을 흘려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그 순간엔 분명 힘든 일이지만 결국엔 한 인간에게 ‘철학’을 갖게 허락한다. - 93p
복된 삶을 누리는 사람이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은 쉽다. 우리는 깨끗한 차를 몰고 다니면서, 하루 종일 길을 걸으며 힘든 숨을 가래침으로 길에 뱉는 휴지 줍는 할아버지를 나무란다. 한 번도 배를 곯아 본 적 없으면서, 사흘을 굶다가 시장에서 빵을 훔치다가 잡힌 우리 시대의 장발장을 보며 혀를 찬다. 자기가 소유한 다섯 채의 집 중 단 하나도 자기 힘으로 사야 할 필요가 없었으면서, 생애 처음 집하나 장만하는 젊은 부부가 집값을 깎아 달라고 비굴한 미소를 지으면 경멸의 눈초리를 보낸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 살지 않으면서 저녁이 되면 산책을 오는 나보다 못사는 사람들이 싫다. 우리 아름다운 교정에 음식을 배달하러 들어오는 오토바이가 눈에 거슬린다. 나의 깨끗한 집을 다른 사람들이 어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담을 높이 쌓는다. 복된 삶을 사는 내 자녀가 그렇지 않은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싫어서 특수학교를 보낸다. 사회에 범죄를 짓고 이미 죗값을 치른 사람들을 우리로부터 영원히 격리하고 싶다. 나는 마치 어떤 종류의 불행에도 면역을 가진 것처럼. 하지만 무슨 말이 내 입에서 나오기 전에 나는 내 원죄를 기억한다. - 216p
나를 스스로 부끄럽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아직 읽지 않은 책이다. - 22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