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25.06.21 · 독서
이 책을 대여해주신 옆자리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저자: 현호정, 이희주, 성혜령, 성해나, 서장원, 강보라, 백온유 출판사: 문학동네
“현진은 인상적인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그 모든 장면을 마음에 새겼다.” — p.19
“영실은 줄곧 순응해왔다. 부모가 사라진 세상에, 책임질 생명이 탄생한 세상에, 남편이 사라진 세상에, 더이상 자기 자신이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 그리고 덜컥 할머니가 된 세상에도.” — p.31
“영실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스스로도 잘 알아채지 못하는 냉혹한 면모였지만 인간이 인간 옆에 붙어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피를 빨아먹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 p.35
“하나 마나 한 일을 하며 ‘변고’의 성격에 대해 상상했던 기억은 난다. 그 ‘변고’라는 게 할머니’만’ 불행해지는 일일지,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감당해야 하는 사건일지. 그렇다면 그것이 내 삶을 어느 정도로 뒤흔들고 전락시킬지. 상상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내 안 어딘가에서 불길한 생각이 돋아나고 새어나오고 솟구쳐올랐다. 내가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나를 계속 추적해 오는 느낌이었다.” — p.43
“쓰는 동안 그만큼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만큼 억지로 썼는데, 이게 왜 말이 되고 소설이 되고 설득이 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부자연스러움도 삶의 속성이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종종 얼기설기 엮여있는 공간에서 불편하고 애매한 관계의 사람들과 터무니없는 사건을 겪곤 하니까. 어쭙잖은 말과 행동을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망하지도 않고 꽤 행복하기까지 하니까.” — p.44
“눈앞에 있는 객관적인 증거를 외면하며 이 모든 게 음모라고 믿는 자발적인 무지는 지금의 우리에게 어딘가 익숙한 데가 있다.” — p.49
“이 순도 높은 아이러니를 통해 작가는 어쩌면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세대에게 자신의 가치가 유효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기만일지라도 그 믿음 없이 버티기 힘든 삶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간단히 부정할 수 있을까. 믿음은 자기 기만을 낳고 자기기만은 또다른 믿음을 필요로 한다. 소설은 그 순환이 이어지는 사각지대에서 끝나지만 그것을 목도한 우리는 거기서 멈춰 설 수 없다. 우리 모두 질문 앞에 서 있다.” — p.50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저 창문의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기분이야.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봉지가 된 기분이야.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추위에 굳어버린 길고양이가 된 기분이야.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눈발 속에서 길을 잃은 발자국이 된 기분이야.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영원히 멈춰버린 분수대가 된 기분이야.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아무도 없는 골목에 켜진 가로등이 된 기분이야.” — p.77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기 시작되던 그날도 지금처럼 눈이 내렸다.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히던 아이들의 책상 서랍에 구더기가 들끓는 우유팩을 하나씩 밀어넣고 나온 날. 교문 앞에서 더러워진 손을 눈뭉치로 닦아내고 은화는 눈을 맞으며 언덕을 따라 내려갔다.” — p.80
“주위의 모든 것이 그녀가 조금 전에 행한 작은 복수와 대비되어 무정한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가로등 아래 춤추는 눈송이들. 창문을 장식한 색색의 전구들. 구세군의 맑은 종소리. 노점에서 풍기는 어묵 냄새. 사람들의 웃음소리… 눈 내리는 연말의 밤거리를 통과하면서 은화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감각했고, 그러는 동안 천천히 비참해졌다. 어린 은화는 배우로서 그 비참함을 잘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만큼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그녀 자신의 것이었으므로. 작고 파란 불씨 하나가 그녀의 정원 안에서 고요히 타올랐다.” — p.81
“차에서 내린 은화의 희끗한 머리 위로 그보다 더 흰 눈이 정직하게 내려앉았다. 아득한 과거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마침내 그녀를 따라잡았다.” — p.81
“상처를 발화하는 건 얼마간 수치를 감당하는 일이다. 제때 처치하지 못해 괴사한 피부나 병으로 도려낸 가슴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 수치를 겪기가 죽기보다 싫어서 필사적으로 저항해왔다는 걸 이제 알겠다. 세간에 떠도는 치유와 극복의 서사에 수동적으로 편입되느니 차라리 나만의 절망으로 고꾸라져 내파되기를 바랐다는 것도.” — p.85
“돌이켜보니 그것이 내가 지난 계절에 한 일의 전부인 것 같다. 자국을 들여다보는 것. 상처 입은 존재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 부디, 우리의 정원이 안녕하기를.” — p.85
“저 자신을 옳게 욕망하는 일은 자신을 향한 타자의 욕망까지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마력을 내뿜는다. 안으로 응집하면서도 바깥을 끌어안는 아우라의 두께. 그 매력적인 운동 속에서 세련된 고독이라는 역접의 수사가 등장한다.” — p.86
“은화와 정림이 짊어졌던 아픔의 무게만큼, 모든 고통은 구체적으로 남다르게 각자를 찌른다. 그렇게 모든 개별적 아픔을 존중하는 신념으로, 생략된 커튼콜에 숨을 죽일 줄 아는 원숙함으로, 외롭고 고단한 정림의 옆얼굴을 조용히 비추는 배려로 이 소설은 쓰였다. 그러니 감히 말한다. 박수는 조금 있다가 터지는 것이 맞는다고. 아직 이 소설의 아픔은, 그 열렬한 결말은 여전히 쓰이고 있으니까.” — p.100
“어쩌면 이쯤에서 책을 덮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오스틴이 혐오 발언을 더 이어나가기 전에 그의 얼굴에 물을 끼얹고 빠르게 자리를 뜨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이 소설이 우리에게 열어 보인 그 작은 가능성을 완전히 잃고 싶지 않다면, 결국 이번에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 조금 더 앉아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나’는 그것을 해내고 있다.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모두 부서진 이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오스틴을 바라본다.” — p.132
“리틀프라이드의 아름다움은 바로 ‘나’의 시선이 견지하는 이 집요함에서 비롯된다. ‘나’는 배반과 수치에 허덕이면서도 오스틴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계속해서 그의 감정과 행동을 헤아리고 또 그로부터 자신의 가장 약한 모습을 비추어 본다.” — p.133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하나의 작은 결정을 세공해낸다.” — p.133
“난 누가 듣는 음악,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만 봐도 어떤 유형인지 예측 가능하거든? 근데 너는 뭐랄까, 난감하달까 아니 지루하다고 해야 하나. 모럴이 없으니까. 그 사람과 헤어지고 돌아가던 길에 모럴의 뜻을 검색해보았다. ‘인생이나 사회에 대한 정신적 태도.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의 구분에 관한 태도.’ 뜻도 모르고 지껄인 게 분명했지만, 내게 적용해보면 완전히 잘못 쓴 것도 아니었다. 그때까지 나는 무엇이 좋고 싫은지, 옳고 그른지 깊게 따지고 들지 못했으니까. 나에게는 태도랄 게 없었다. 그 사람의 허울뿐인 고상함이 지긋지긋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체감되는 나의 무지와 단순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 p.147
“하드보드지처럼 두껍고 견고한 사랑도 있을 테지만, 대개의 사랑은 습자지 같아서 단 한 방울의 반감과 의심으로도 쉽게 찢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푹 젖어도 찢어지지 않고 도리어 곤죽처럼 질퍽해진다. 사랑이고 죄의식이고 찬미고 경멸이고 죄다 흡수해 종내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로.” — p.186
“가부를 나눌 수 없는 무수한 문제 속에서 우리는 자주 구겨지고 찢어지며 괴리를 겪는다. 해답을 구하고 싶은 마음으로 썼으나 쓰고 보니 미답으로 남았다. 그러나 구겨지고 찢어지면서도 계속되는 {무엇}은 분명 유의미하다고 믿는다. 그 일그러진 괄호는 우리가 질문을 놓지 못하도록 부추기는 단초가 될 테니.” — p.187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과 그 사람이 가지고 올 불확실한 미래까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라면, 신오는 지금가지 누구도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누군가를,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기란 불가능할 것이었다.” — p.201
“이상의 성찰에서 그는 두 가지 신념을 보여준다. 하나는, 적어도 자기 자신의 삶만큼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랑이란 무릇 그러한 통제 가능성으로 지어진 두 사람분의 생이 깔끔하게 결합하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안타깝게도 이 두 가지 신념은 모두 그릇된 것인데, 인간에게 주제성은 다만 노력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는 영역에 한해 허락될 뿐이며 바깥에서 다가오는 타자를 사랑하는 일은 주권이 거의 허락되지 않는 미지의 시공간이 삶을 침범하도록 허하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사랑과 삶에 대한 아주 틀려먹은 신념에 기초하여 원경과의 헤어짐을 선택했던 것이다.” — p.225
“실제로 벌어진 일과 발화된 말이 현실의 표층을 구성한다면, 신오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반-현실로서의 미래에 대한 핍진한 상상력은 가능태로서의 현실, 즉 심층의 영역을 구성한다. 신오의 세계가 불안으로 점철된 이유는 그가 현실보다 미래의 가능태들이 지닌 힘을 압도적으로 크게 평가하고 그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불안은 가능태가 현실태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발현되며, 불안한 주체의 세계는 미지의 외부를 향해 열리지 못하고 자신의 내부만을 순회하는 폐쇄성을 띈다. 헤어진 연인 앞에서 신오가 느끼는 말 못할 수치심과 패배감은 그가 스스로 닫아버린 현실의 부산물이다.” — p.229
“이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일이란 생의 난관들로부터 생존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우리는 제 손으로 삽을 드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 p.235
“그러므로 신오에 대해 원경이 내내 유지하는 다소 차가운 태도는 역설적으로 그가 스스로 일구어낼 첫 시작을 기다리는 끈질긴 태도다. 그가 세계의 으스스함을 끝내 통과하고 그것과의 힘의 격돌 속에서 승리하여 세계의 표층에 두 발을 스스로 딛게 되길 믿는 말없는 기다림이다.” — p.235
“있는 거 없는 거 닥닥 긁어 주다보면 다 준 것 같아도 또 차오르는 순간이 있었고 그럼 또 줬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하는 게 좋아서 계속 줬다.” — p.240
“이게 유리의 대단한 점이다. 그렇게 밀도 높은 인생을 살았는데 아직 때를 덜 탔다는 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유리에게 삶은 신기한 것이고 거기엔 기대와 희망뿐이었다. 그런 순수함이 빛을 내뿜고, 빛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기에 저절로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뺨에도 쏟아진다. 마지 지금처럼.” — p.241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이어진 질긴 목숨이 영 낯설어서, 이상해서, 징그러워서. 이게 내 것 같지 않아서. 그걸 가졌단 수치심도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이렇게 외롭게 이렇게 아프게 이렇게 슬프게 배고프게 내가 계속 여기 있다는 게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 p.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