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2025.06.24 · 독서
🖋 저자: 김용택, 김경후, 도종환, 이정록, 이설야, 신두호, 안미옥, 박연준, 신용목, 박성우, 이시영, 박신규, 리산, 박철, 장석남, 박라연, 임경섭, 김명수, 김정환, 김중일, 이대흠, 김사이, 나희덕, 이기인, 정희성, 박소란, 이경림, 전동균, 노향림, 박경희, 유이우, 고영민, 황인찬, 이영재, 손택수, 이정훈, 백무산, 이산하, 고형렬, 박형준, 안희연, 김현, 박승민, 안도현, 유병록, 최정례, 정현우, 곽재구, 신미나, 이상국, 김승희, 최지은, 이문재, 권창섭, 김선우, 이근화, 강지이, 정다연, 이종면, 임선기, 김수우, 심재휘, 최백규, 송진권, 조온윤, 문태준, 최지인, 신철규, 김유림, 신동호, 송경동, 이용훈, 유혜빈, 전욱진, 정호승, 유수연, 여세실, 이동우, 손유미, 주민현, 정끝별, 유현아, 채길우, 황유원, 김해자, 장이지, 강우근, 남길순, 정우영, 한재범
🖋 엮은이: 안희연, 황인찬 🖋 출판사: 창비
까치설날 - 이정록
까치설날 아침입니다. 전화기 너머 당신의 젖은 눈빛과 당신의 떨리는 손을 만나러 갑니다. 일곱시간 만에 도착한 고향, 바깥마당에 차를 대자마자 화가 치미네요. 하느님, 이 모자란 놈을 다스려주십시오. 제가 선물한 점퍼로 마당가 수도 펌프를 감싼 아버지에게 인사보다 먼저 핀잔이 튀어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내가 사준 내복을 새끼 낳은 어미 개에게 깔아준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개만도 못해요? 악다구니 쓰지 않게 해주십시오. 파리 목숨이 뭐 중요하다고 손주 밥그릇 씻는 수세미로 파리채 피딱지를 닦아요? 눈 치켜뜨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버지가 목욕탕에서 옷 벗다 쓰러졌잖아요. 어머니, 꼭 목욕탕에서 벗어야겠어요? 구시렁거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마트에 지천이에요. 먼젓번 추석에 가져간 것도 남았어요. 입방정 떨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루 더 있다 갈께요. 아니 사나흘 더 자고 갈게요. 거짓부렁하게 해주십시오. 뭔 일 있냐? 고향에 그만 오려고 그러냐? 한숨 내쉴 때, 파리채며 뒤덫을 또 수세미로 닦을까봐 그래요. 너스레 떨게 해주십시오. 용돈 드린 거 다 파먹고 가야지요. 수도꼭지처럼 콧소리도 내고, 새끼 강아지처럼 칭얼대게 해주십시오. 곧 이사해서 모실게요. 낯짝 두꺼운 거짓 약속을 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당신의 나무만이 아님을 가르쳐주었듯, 내 나무그늘을 불평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대대로 건네받으셨다는 금반지는 다음 추석에, 그다음, 그다음, 몇십년 뒤 설날에 받겠습니다. 당신의 고집 센 나무로 살겠습니다. 나뭇잎 한장만이라도 당신 쪽으로 나부끼게 해주십시오.
캔들 - 안미옥
궁금해 사람들이 자신의 끔찍함을 어떻게 견디는지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어떻게 지우는지
하루의 절반을 자고 일어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흰색에 흰색을 덧칠 누가 더 두꺼운 흰색을 갖게 될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은 어떻게 울까
나는 멈춰서 나쁜 꿈만 꾼다
어제 만난 사람을 그대로 만나고 어제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징그럽고 다정한 인사
희고 희다 우리가 주고받은 것은 대체 무엇일까
청혼 - 박신규
수억년 전에 소멸한 별 하나 광속으로 빛나는 순간이 우리의 시간이라는, 은하계 음반을 미끄러져온 유성의 가쁜 숨소리가 우리의 음악이라는, 당신이 웃을 때만 꽃이 피고 싹이 돋고 당신이 우는 바람에 꽃이 지고 낙과가 울고 때로 그 낙과의 힘이 중력을 지속시킨다는, 하여 우리의 호흡이 이 행성의 질서라는 그런 오만한 고백은 없다네
바람에 떠는 풀잎보다 그 풀잎 아래 애벌레의 곤한 잠보다 더 소소한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위해, 주름진 치마와 해진 속옷의 아름다움 처진 어깨의 애잔함을 만지기 위해, 수십년 뒤 어느 십일월에도 순한 바람이 불고 첫눈이 내려서 잠시 창을 열어 눈발을 들이는데
어린 새 한마리 들어와 다시 날려보내주었다고 그 여린 날갯짓으로 하루가 온통 환해졌다고 가만가만 들려주고 잠드는 그 하찮고 미미한 날들을 위해서라네
심야식당 - 박소란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 국수를 잘하는 집이 한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작다란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형광등 거무추레한 불빛 아래 불어 선득해진 면발을 묵묵히 건져 올리며 혼자 밥 먹는 일
그래서 요즘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이토록 적막한 - 전동균
나무는 왜 땅에 서 있어야 하고 새들은 하늘을 날아야 하는지
날마다 해와 달을 깨우고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지 그 힘이 왜 없어도 좋은 우리를 여기 있게 하고 아침이면 눈꺼품을 열게 하는지
해달을 왜 물에 떠 해초를 감고 잠자는지, 털도 없는 톡토기는 어떻게 영하 70도의 혹한을 견디는지, 피파개구리는 왜 혀가 없는지, 오리너구리는 어떻게 알을 낳게 됐는지
이 작은 가슴에 어떻게 바다와 사막이 함께 출렁이고 사랑은 늘 폭탄을 감추고 있는지 헛된 꿈들은 사라지지 않는지
왜? 왜? 왜?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을 우리는 걸어간다 옆구리에 지느러미가 돋아나도 비늘들이 발등을 뒤덮어도
우는 대신 웃는 표정으로
정지의 힘 - 백무산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 유병록
우리 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않기로 해요 처음도 아니잖아요
아무 다짐도 하지 말아요 서랍을 열면 거기 얼마나 많은 다짐이 들어 있겠어요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해요 앞날에 대해 침묵해요 작은 약속도 하지 말아요
겨울이 와도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돌아보지 않기로 해요 봄을 반성하지 않기로 해요
봄이에요 내가 그저 당신을 바라보는 봄 금방 흘러가고 말 봄
당신이 그저 나를 바라보는 봄 짧디짧은 봄
우리 그저 바라보기로 해요
그뿐이라면 이번 봄이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오래 만진 슬픔 - 이문재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듯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 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 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토요일에도 일해요 - 유현아
아직도 토요일에 일하는 곳이 있어요? 라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어요
계절을 앞서가며 미싱을 밟지만 생활은 계절을 앞서가지 못했지요
어느 계절에나 계절 앞에 선 그 사람이 있어요 숙녀복 만들 때에도, 신사복 만들 때에도, 어린이복 만들 때에도 익숙한 손가락은 미싱 바늘을 타고 부드럽게 움직였어요
단 한 번도 자기 옷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요
여름엔 에어컨을 틀기 위해, 겨울엔 난방기를 틀기 위해 창문을 닫았어요 떠다니는 실밥과 먼지와 통증 들은 온전히 열려 있는 창문 같은 입으로 들어갔어요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그의 몸 여기저기서 튀어나왔고 가끔은 미싱 바늘이 검지를 뚫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일요일이 즐겁기 위해 토요일에 일해요, 라고 대답했어요 끝에는 끝이 없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공장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숨어 있어 안 보일 뿐이에요 익숙하지 않은 토요일의 무게감에 갇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씩씩하게 명랑하게 아픔을 이야기하는 그의 입 앞에서
낮게 부는 바람 - 유혜빈
그건 정말이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잠들도록 한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잠들 수 있도록 이마를 쓰다듬어주는 일이야
늦은 여름 아침에 누워 새벽을 홀딱 적신 뒤에야 스르르 잠들고자 할 때
너의 소원대로 스르르 잠들 수 있게 되는 날에는
저 먼 곳에서 너는 잠깐 잊어버리고 자기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한 사람이 너를 잠들게 하는 것이라는 걸 멀리서 너의 이마를 아주 오래 쓰다듬고 있다는 걸
아무래도 너는 모르는 게 좋겠지